5월의 졸업식 (하) 창작 백합 소설


이글루스가 내용이 너무 길다고 퇴짜를 놓네요. 어쩔 수 없이 반으로 나눠 올립니다 ㅠㅠ

* * *

때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민영도 나도 한동안 바빴다. 시영은 그날 이후로 한층 가라앉아 보였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어느덧 5월로 접어들었고 교내에는 라일락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민영과 나는 뒷산에 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친척 아주머니한테 여쭤봤는데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
", 빙의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떻게 열쇠가 되는데?"
"그때 기억나시죠? 제가 느낀 감각, 그러니까 떡볶이 맛을 시영 선배랑 잠시 공유했잖아요. 동시에 선배의 기억 일부가 저한테로 흘러들어왔어요."
", 아이스크림 말이지. 그럼 설마,"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민영의 표정이 한층 무거워졌다.

". 빙의한 상태로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해보는 거예요. 제 몸에 그 기억이 흘러들도록."
"과연 잘 될까? 정작 본인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거야 해 봐야 알겠죠. 어차피 아주머니가 직접 오지 못하는 이상 결국은 차선책일 수밖에 없어요."

"하긴 그렇겠지."
"그리고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요, 어쩌면 일부러 떠올리려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어요."

나는 발끈한 나머지 입을 열었지만 결국 반박하지는 못했다. 지난번에 시영은 끝끝내 병원 생활에 대해 털어놓기를 거부했다. 본인의 말대로라면 죽은 사람은 더는 상처받지 않을 터인데도. 시영은 분명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게 도대체 뭘까.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 민영이 내 팔을 붙들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약간 창백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잠깐만 쉬었다 가도 될까요?"
"? , 미안. 여기 벤치에 잠깐 앉자."

우리는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곳에서는 운동장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축구부 아이들이 한껏 함성을 지르며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그때마다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민영은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불쑥 이렇게 중얼거렸다.

"저 아이들이 부러워요. 저렇게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게."
"수술은 지금 당장은 못 받는 거야?"
". 지난번 입원했을 때 뭐라고 잔뜩 설명을 해주긴 했는데, 여하튼 성인이 되어야 할 수 있대요. 다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하면 위험 부담이 크다나 봐요."
"졸업하자마자 당장 하고 싶겠네."
"그렇죠.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어요. 결국 전 운동장은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하고 졸업하겠지만."

민영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제는 완연한 봄바람이 불어오며 긴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그와 함께 진한 라일락 향이 훅 끼쳐오며 나를 아찔하게 사로잡았다. 나는 그 옆모습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민영은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엄격한 체육 선생님이라도 저만은 봐준단 말이죠. 너는 아프니까, 무리하면 안 되니까, 운동장 한 바퀴 안 뛰어도 돼. 저기 앉아서 보기만 해도 돼, 이런 식으로."
", 그렇겠지. 책임 문제도 있고."
"처음엔 그게 좋았어요. 솔직히 몸도 힘들었고요. 그런데 갈수록 싫더라고요. 저만 특별 취급받는 게."

민영은 그제서야 운동장에서 시선을 돌리더니 나를 다시 마주 보았다.

"너무 제 얘기만 늘어놓았네요. 선생님 얘기도 좀 해주세요. 왜 교사가 되려고 하셨어요?"
"시영이가 유령이 되었다는 걸 뒤늦게야 알았거든. "

딱 이맘때였다. 졸업하고 나서 처음으로 맞이한 스승의 날이었다.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가자고 부추기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따라왔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교무실을 둥둥 떠다니던 시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의 충격을.

"여기 돌아오려면 교사가 되든가 그도 아니면 행정실 직원이 되든가, 둘 중 하나지."

어차피 그때 다니던 학과는 점수에 맞춰서 들어갔을 뿐이라 그다지 미련은 없었다. 나는 그길로 반수를 해서 교육 관련 전공으로 다시 입학했다. 민영은 그 말을 듣고 나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시영 선배 때문에 10년째 여기 머물고 있는 거네요?"
"? , , 그렇지."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말이 내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파문을 남겼다.

* * *

시영은 늘 그랬듯이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은 채였다. 온몸으로 하늘이 들여다보였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문득 그 노래의 한 구절이 생각날 만큼 새파랗고 높은 하늘이었다. 몽실몽실한 구름은 꼭 솜사탕 같았다. 손을 뻗기만 하면 한 움큼 뜯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렵사리 시영의 뒤로 가서 섰다.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시영이 선수를 쳤다.

'요새 좀 이상해. 뭔가가 어렴풋하게 떠올랐다가는 다시 사라져.'
"시영아."
'그게 너무 무서워.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영아, 일단 내 말 좀 들어."
'그냥 이렇게 계속 살면 안 돼?'

그렇게나 필사적인 표정은 생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익숙한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찔러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미안해. 나 더는 이렇게 못 살겠어."
'무슨 뜻이야?'
"죄책감을 끌어안고 사는 거. 이젠 지긋지긋해."

결국 시영 선배 때문에 10년째 여기 머물고 있는 거네요? 민영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말 그대로였다. 나는 시영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 진로마저 바꾸었다.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건 나름대로 즐거웠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다.

"넌 어차피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겠지. 이제는 너무 답답해. 적어도 네가 정말로 내가 뱉은 말 때문에 죽었는지는 알고 싶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나한테는 중요해."

내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했던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기가 무섭게 얼어붙은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답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애써 모르는 척했을 뿐이지. 시영은 이제는 거의 울먹이다시피 했다.

'아까 나 떡볶이 맛보고 나서, 내가 그걸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새삼 깨달았어. 앞으로도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면 안 돼? 네가 여기저기 날 데려다주면 되잖아.'
"시영아."
'난 너만 있으면 돼. 여태까지 계속 그랬듯이.'

유령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서글픈 광경조차 내 마음을 조금도 돌려세울 수 없었다. 이미 내 안에서는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 시영도 마찬가지겠지.

"미안하지만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 빙의 체질인 아이가 얼마나 되겠어."

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시큰거리는 가슴 한구석을 애써 억눌렀다.

"앞으로 일주일 뒤야. 넌 민영이한테 빙의할 거고 나는 졸업식 날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할 거야."
'그래.'

시영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은 마지막까지도 내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기 위해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 * *

나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2월의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는 달리 선명한 푸른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5월에 졸업식이라니 어째 좀 어색하네. 나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을 느끼면서 학교 건물에 기대어 섰다. 저쪽에서는 민영과 시영이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과연 잘 될까. 그때랑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를 텐데.'

이제 와서 의구심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민영이 이제 준비됐는지 이쪽을 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곧이어 시영, 아니 민영의 탈을 쓴 시영이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도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마른침을 억지로 삼키고 나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때처럼. 시영한테 잔뜩 화가 난 것처럼.

"시영아. 애들이 단체 사진 같이 찍자는데 좀 와봐."
'난 됐어. 너나 가서 찍어.'
"너 졸업 앨범도 입원하는 바람에 못 찍었잖아. 너 교복 입고 온 김에 애들이 몇 장 찍어주겠대. 그러니까,"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마. 난 분명히 싫다고 했어.'

분명히 다른 사람의 얼굴이며 목소리인데도 그 모습은 여지없는 시영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기분이었다. 일단 여기까지는 각본 대로였다. 이 뒤부터가 본격적으로 괴로워질 터였다. 나는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10년 동안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울려대던 말들을 마침내 공기 중으로 내보내야 했다.

"너 도대체 왜 그래? 애들이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너 신경 써주는 거잖아. 사진이라도 같이 찍자고. 그게 그렇게 힘들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날 좀 내버려 둬!'
"시영아, 제발. 내 얼굴 봐서라도 한 번만 좀 어울려주면 안 돼?"
'나 어제 병원 갔다 왔어. 얼마 안 남았대.'

잠깐만, 그때는 분명 이런 말 안 했잖아.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정작 시영은 덤덤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빙의된 상태라 민영한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기억에 새겨진 그대로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해. 평생 그렇게 살다 죽든가!"

10년 전의 시영은 내 폭언을 듣고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이제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멈춰 섰다. 차마 뒤돌아볼 용기는 없었다. 등 뒤로 시영이 비척비척 걸음을 내딛는 기척이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이내 뒤따라왔다. 간신히 뒤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시영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젖힌 뒤였다.

"기다려!"

뭐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시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옥상의 난간에 기대어 섰다. 지금이야 사고의 위험 때문에 울타리를 제법 튼튼하게 둘러쳤지만 그때는 군데군데 허술해서, 저렇게 몸을 조금만 앞으로 기울여도. 나는 시영의 허리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움찔하는 기색이 전해져 왔지만 개의치 않고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내 것이 아닌 기억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 * *

"길어봐야 몇 달일 거예요. 이제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 그러면 입원해야 하나요?"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싶다면요. 기껏해야 진통제 주사를 놔주는 정도예요. 결국 선택은 시영 양이 하는 거겠지만."

어려서부터 죽음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따라붙었다. 언젠가 이런 일이 닥치리라는 것도 각오는 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역시 막상 선고가 떨어지고 보니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 곧 졸업인데. 대학 합격증까지 받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대학에 다니기로 했는데. 캠퍼스 커플을 꿈꾸며 함께 나누는 일상을 그려본 게 바로 엊그제 일인데.

건강한 아이들의 무리에 섞이기 싫었다. 그들의 튼튼한 육체가, 내가 가질 수 없는 미래가 꼴도 보기 싫었다. 누구보다도 사랑하던 사람조차 오늘은 멀게만 느껴졌다. 평생 그렇게 살다 죽으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이제 곧 죽는데. 나는 문득 옥상의 난간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산을 깎아 만든 학교답게 바닥은 아득하게 멀리 보였다. 그것이 꼭 입을 벌리고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얼른 이리로 뛰어내리라고.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아.
하지만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가장 찬란하던 시절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멀리서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머지않아 웅웅거리는 소음으로 변했다. 나는 거기서 네 목소리를 잡아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너한테 잊히고 싶지 않아.
아무리 끔찍한 꼴이라도 좋으니까
네 기억에 오래도록 새겨지고 싶어.
그게 설령 너한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고 해도.

"그저,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을 뿐이었어. 그랬더니 순식간에, , 하고. 그 뒤는 너도 잘 아는 광경이지."

마지막으로 망막에 새겨진 것은 후회와 경악으로 일그러진 네 얼굴이었다. 어렴풋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걸로 널 조금이라도 오래 붙들어둘 수 있겠지. 걱정 마. 난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야. 언젠가 넌 여기로 돌아올 테니까. 그리고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너는 언제나 착실한 모범생 타입이었으니까.

* * *

맞붙었던 몸이 떨어지자 기억의 파도도 서서히 밀려나갔다. 시영은 젖은 눈가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눈가에도 어느새 뜨거운 것이 어렸다. 그걸 주먹으로 훔치면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네 미련이었구나. 나한테 잊히지 않는 것이."

민영의 모습을 한 시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너는 나이를 먹고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깊게 패었던 상처였는데도, 생전 처음 겪어본 상실이었는데도 결국은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는 못했다. 시영이 마련해둔 죄책감이라는 족쇄를 지긋지긋하게 느끼는 내가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교사가 되어 모교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시영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너랑 함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시영아."
"그래서 계속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나조차도 마지막 순간을 잊어버리게 돼서."
"......"
"하지만 이젠 정말로 놓아줘야 할 때라는 거겠지."

시영이 한순간 비틀거렸고 나는 무심코 팔을 뻗어 그 몸을 받아냈다. 선생님? 민영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영은 늘 그랬듯이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5월의 햇살을 등지고 있어서일까. 그 윤곽이 유독 찬란하게 빛났다. 꺼지기 직전에 가장 밝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시영, 선배."
'둘 다 정말로 고마웠어. 잠시나마 즐거운 꿈을 꾸게 해줘서.'
"선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민영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갓 빙의에서 풀려나서인지 어딘지 낯빛이 창백해 보였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더없이 맑고 또렷했다.

"졸업 축하해요. 10년이나 늦어졌잖아요?"
'.....'

시영도 나도 어딘가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덕분에 나도 웃으면서 마지막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시영아, 졸업 축하해."

시영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점차 투명해지더니 끝내는 푸른 하늘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나는 행여나 빛 한 줌이라도 건질까 싶어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은 그저 허공만을 움켜쥘 뿐이었다.

"이젠 정말로... 끝이구나."

그제서야 눈물이 뺨을 타고 한 줄기 흘러내렸다.

* * *

세월은 그 뒤로도 무심히 흘러갔고 어느새 민영이 졸업할 날도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졸업식 하루 전날이었고 나는 이런저런 준비를 위해 학교로 왔다. 일처리를 마무리 짓고 늘 하던 대로 옥상으로 올라갔다. 비록 나를 뒤돌아볼 시영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고 하더라도. 옥상 문을 열어젖히자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뒷모습과 함께.

"오늘은 어째 선수를 뺏겼네. 졸업식은 내일인데 왜 벌써 왔어?"
"아마 선생님하고 비슷한 이유에서요."

내일은 아마 온갖 행사로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민영이 그렇게 덧붙이며 아이스크림에다 향을 하나 꽂았다. 겨울에 웬 아이스크림이래. 나는 의아해하며 물어보려다가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콘플레이크 몇 개를 얹은 싸구려 바닐라 아이스크림. 내가 학창 시절에 즐겨먹던 바로 그것이었다. 민영이 담담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떡볶이 집 사장님한테 한번 말해봤거든요. 기계라면 이쪽에서 들여놔줄 테니까 혹시 다시 서비스로 줄 생각 없냐고."
"아무리 그래도 요즘 물가에 수지 타산이 맞으려나 모르겠네."
"그 맛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던데요."

사복을 입은 민영은 어딘가 신선해 보였다. 여전히 핼쑥한 인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검은 코트에 두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은 또래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얼마 전에 수술을 잘 마쳤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대신 줄곧 마음에 걸리던 점을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그 날 말이야. 중간에 시영이 대사를 바꾼 건 혹시 네 아이디어였어?"
", 어떻게 아셨어요?"
"너 말고는 그럴 사람이 없잖아. 시영이가 스스로 얘기할 성격도 아니고."

겨울이라서 그런지 아이스크림은 좀처럼 녹지 않았다. 향이 한 줄기로 피어오르며 잿빛 하늘로 흩어졌다. 그것을 가만히 들이마시고 있자니 괜히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민영의 목소리가 이상하리만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전 솔직하게 얘기해보라고 권했을 뿐이에요. 그때 못했던 이야기가 있으면 그냥, 울고불고 소리쳐도 좋으니까 일단 해보라고요"
"그랬구나. 뭐라고 해야 하나, 참 너답네."

우리는 거기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일은 눈이 내린다고 했던가. 옅은 햇살이 먹구름을 비집고 간신히 새어 나왔다. 선생님. 문득 민영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건 다른 얘긴데요, 그렇게 운을 떼는 민영의 눈은 장난기로 가득했다.

"전 좀 알 것 같던데요. 선생님 좋아했던 여자애들이 왜 다 떠나갔는지."
"그래? 한번 얘기해 봐. 나도 궁금하네."
"당연한 거 아니에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게 너무 뻔히 보이잖아요."

민영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싱긋 웃었다. 아직 한겨울인데도 이상할 만치 뺨에 열기가 몰려들었다. 그러게. 그랬던 거구나. 나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으며 민영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내 안에서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소리였다.


덧글

  • Freck 2018/10/10 14:15 # 삭제 답글

    와... 너무 가슴을 울리는 단편이었어요. 말로 설명할 수가 없네요. 시영이를 10년간 보고 있던 주인공이나( 그러고보니 이름이 안나온 것 같네요?? 세상에. ) 그걸 함께 헤쳐나가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민영이 마주보는 장면도 너무 좋고 이제 둘이 어떻게 될지 너무 궁금한데 ><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도 단편의 묘미인 것 같아요. 정말 재밌게 봤어요 작가님 고마워요!!
  • 요라 2018/10/11 18:09 #

    ㅠㅠ 감사합니다. 사실 이게 공모전 냈다가 떨어진 단편이라 올릴지 말지 고민했는데 이런 감상도 받았으니 올리길 잘했네요. 제가 생업에 치여서 답글은 잘 못 다는데 언제나 양질의 피드백 주셔서 늘 감사히 생각합니다 ^^

    이건 여담인데 이 고등학교는 자연이가 다니던 그 학교예요. 별로 중요한 설정은 아니라서 눈치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ㅋㅋ
  • Freck 2018/10/11 20:35 # 삭제

    과찬이십니다 작가님 ㅠㅠ 이런 단편 써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헉, 그럼 자연이는 저 선생인 주인공과 마주쳤을 수도 있는것일까요?! 시기나 여러 사정 상 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알려주셔서 좋기도 하고 그런데 좀 충격... 아 그리고 작가님 바쁘신데도 글 이렇게 올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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